책소개
임포(林逋)는 송대(宋代) 초기에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40세 전후에 지금의 항저우(杭州) 시후(西湖)호 부근의 구산(孤山)산에 은거해 도시로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시를 지으며, 매화와 학을 벗하며 살았기에 후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은일 시인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원(元)나라 사람 방회(方回)는 송 초의 시단을 크게 백체파(白體派)와 곤체파(昆體派) 그리고 만당체파(晩唐體派)로 구분하면서, 임포를 만당체파(晩唐體派)에 속한다고 규정했다. 소위 만당체파(晩唐體派)란 승려나 도사같이 세상을 멀리한 사람들을 비롯해 현실에 참여하기보다는 은일을 추구한 시인들로, 그윽하며 맑고 고고한 풍격을 추구했다. 임포는 대표적인 은일 시인이므로 기본적으로는 만당체파(晩唐體派)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임포는 분명 은일 생활을 구가한 시인이지만, 어린 시절 학문의 원천은 역시 유교(儒敎) 경전이었다. 이에 따라 청소년 시절에는 세상을 경영하겠다는 정치적인 이상을 가졌다. 40세 전후 은거하기 이전의 20대와 30대 행적은 비록 명확하지 않지만, 지금의 장쑤(江蘇)나 저장(浙江)과 중원(中原) 지역을 여행하며 많은 경험을 쌓은 것을 그의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시의 최고봉(詩將)>에서 “풍소(風騷)를 최고봉으로 치켜세우니 천고(千古)에 위명이 높이 솟을 만하네. 두보(杜甫)는 늘 숭배를 받았고, 왕창령(王昌齡)은 아랫사람을 거느릴 만했다네(風騷推上將, 千古聳威名. 子美常登拜, 昌齡合按行)”라고 말한다. 이 시에서 풍소(風騷)란 바로 현실주의 시가를 가리키며, 그 대표적인 시인으로 당대(唐代)의 두보와 왕창령을 예로 들고 있다. 또한 ≪임화정 선생 시집(林和靖先生詩集)≫의 서문은 송 초 시인 매요신(梅堯臣)이 썼는데, 그 서문에서 “도를 말하는 데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들었다(其談道, 孔孟也)”라고 공맹(孔孟)의 유가 사상과 관련한 임포의 사상을 언급하고 있다.
임포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은일 시인답게 불도(佛道)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은거한 이후에 불도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런 사상을 바탕으로 은은하고 고고한 심정을 시를 통해 표현했다. 그러나 사실상 임포는 은거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승려나 도사와 왕래하며 고고한 품성을 길렀다. 시를 통해 보면 30여 명의 승려 및 도사와 왕래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시가 창작에서도 불교나 도가와 관련된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사상을 정리한다면, 역시 유가의 수양을 바탕으로 해서 불교 선종(禪宗)의 참선에서 배웠던 심리적 평정, 그리고 도가를 통해 형성된 고상하고 평온한 정신세계가 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시가는 310여 수다. 원래는 더욱 많아 현재 남아 있는 시는 전체 시가의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비록 310여 수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다양하다. 크게 분류해 보면 은일 생활의 정서를 표현한 은일시(隱逸詩), 사물을 묘사하는 영물시(詠物詩), 왕래한 사람들과의 교유시(交遊詩), 일부분이지만 현실성을 가진 정치시(政治詩)가 있다.
200자평
매화가 아내고 학이 자식이다. 경치 좋은 서호가 앞마당이요 한적한 고산(孤山)이 집이다. 책 읽고 시 읊다가 무료하면 밭일하고 낚시하니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수많은 선비들이 임포를 부러워한 이유다. 은일시, 매화시가 이로부터 유행했다.
지은이
임포(林逋, 967∼1028)는 송대(宋代) 초기에 활동한 은일 시인이다. 자는 군복(君復)이며, 967년 지금의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났고 1028년 세상을 떠났다.
은일 시인이기에 그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으며, 혹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략하다. 지방지에 해당하는 ≪함순임안지(咸淳臨安志)≫에 기록된 <임포전(林逋傳)>, 명대의 판본 ≪임화정 선생 시집(林和靖先生詩集)≫에서 송인(宋人) 상세창(桑世昌)이 쓴 <임포전(林逋傳)> 그리고 ≪송사(宋史)·은일전(隱逸傳)≫에 임포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정리하면, 임포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 가난하고 고아로 자랐지만 어린 시절 학문에 힘써 박학다식했다. 또한 그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오만한 성격이었으며, 또한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 집을 떠나 강회(江淮)와 중원(中原) 일대를 여행했으며, 40세 전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 아래에 은거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줄곧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의 여행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의 시가를 통해 일부 상황은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느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쓸모가 있는 사람으로 자임하며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오만함과 협기, 굽힐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그 이상은 실현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인물들과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지만, 이들 역시 대부분 권문세가가 아니라 풍류를 즐기는 평범한 인물이나 실의한 관리 그리고 불도(佛道)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청소년 시기의 경험으로 더더욱 세상의 명예를 경시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만의 고매한 인격과 사상이 형성되었다. 그런 결과의 하나가 바로 이상 실현을 위해 권문세가를 찾아다니며 추천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통치 집단에 대해 분개하거나 비판하는 의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즉, 그가 은거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반감은 아니며, 세상의 번다한 일을 싫어하고 고상한 품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은일 생활을 시작한 임포는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한 후 20여 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결혼도 하지 않으며 시를 짓고 매화와 학을 기르며 살았는데, 이 때문에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녀로 한 시인[梅妻鶴子]’으로 현재까지 이름이 전한다. 은거한 후에 그의 고매한 품성이 오히려 널리 전해져 많은 인물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중 황제인 진종(眞宗)이 곡식을 하사하고 관리를 시켜 안부를 물은 일이 있어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임포에 관한 기록이 있는 문헌들을 보면 새로운 측면이 보이는데, 예들 들면 그는 시를 잘 지어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서예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옮긴이
임원빈(任元彬)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후에 동 대학원에서 중국 고전 시가를 전공하며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대학(復旦大學) 고전문학 박사 과정에 입학해 1998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 2월부터 7월까지 중국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중문과에서 연구학자(硏究學者)로 연구 활동을 했다. 박사 학위논문은<唐宋之際文學與思想政局硏究>이다. 저서로는 ≪현대 중국어 실용문≫, ≪중국어 어휘 활용 100%≫, ≪중국 고전 시 세계≫, ≪고대 한중(韓中) 시승(詩僧)의 시가 탐구≫, ≪唐末詩人的心理世界≫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중국 문학 사료학≫이 있고, 역서로는 ≪그 상상력의 비밀 3≫, ≪그 상상력의 비밀 4≫, ≪육구몽 시선(陸龜蒙詩選)≫,≪두순학 시선(杜荀鶴詩選)≫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당(唐) 말(末) 시가에 나타난 문인 심리>, <송(宋) 초(初) 시가 중의 숙세정신(淑世精神)>, <불교 선종(禪宗) 문화와 당(唐) 말(末)의 시가>, <시승(詩僧) 제기(齊己)의 풍소지격(風騷旨格)과 시 창작>, <≪송릉집(松陵集)≫ 중의 피일휴(皮日休) 시가 연구>, <육구몽(陸龜蒙) 시가에 나타난 현실성>, <두순학(杜荀鶴) 시가에 나타난 심리 세계>, <두순학(杜荀鶴) 시가의 현실성>, <임포(林逋) 시가의 내용 고찰> 등 50여 편이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평택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 숭실대학교 등에 출강했으며,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연구교수다.
차례
권1(卷一) 오언고시(五言古詩) 오언율시(五言律詩)
해 질 무렵 호수의 누각에서 멀리 바라보며
가을날 서호(西湖)에서 한가로이 배를 띄우고
서호에서 배를 타고 눈을 맞이하며
호숫가 촌락에서 밤중에 흥이 일어
호수와 산에서 은거하며−둘째
숲 속에 은거하며 스스로 써 보다
겨울 저녁 산촌에서
여관에서 마음속에 품은 것을 쓰다
대성사(臺城寺)의 물가 정자를 바라보며
우연히 적다
장차 사명산(四明山)으로 돌아가려다, 밤중에 마주 앉아 이야기하다 임(任) 군과 이별하며
과거 보러 가는 수재(秀才) 풍팽년(馮彭年)을 보내며
선성(宣城)으로 가는 사제상인(思齊上人)을 송별하며
장회(張繪) 비각교서랑(秘閣校書郞)에게 드리는 아홉 가지 시제(詩題) 중에서 시의 최고봉
동소궁(洞霄宮)에 묵으며−둘째
고산의 눈 속에서 보이는 것을 쓰다
권2(卷二) 칠언율시(七言律詩)
호수와 산이 있는 곳에서 은거하며−첫째
호수에서 느지막이 돌아가며
서호(西湖)의 봄날
여름날 연못에서
깊은 곳에 은거하는 중에 이런저런 흥이 일어서−첫째
깊은 곳에 은거하는 중에 이런저런 흥이 일어서−넷째
고산사(孤山寺) 단(端) 상인(上人)의 방에서 보이는 것을 쓰다
산곡사(山谷寺)
정원의 오두막집
눈−셋째
산속 정원의 작은 매화−첫째
산속 정원의 작은 매화−둘째
매화
또 두 수(매화 둘째)
산림 은거
권3(卷三) 칠언율시(七言律詩)
범중엄(范仲淹) 사승(寺丞)을 보내며
과거를 보러 가는 오(吳) 수재를 배웅하며
문광(文光) 스님이 천태산(天台山)으로 유람 가는 것을 배웅하며
전당(錢塘)의 읍장(邑長) 고(高) 비교(秘校)에게 드리며
내문(耏門) 관직을 맡은 양(梁) 진사(進士)에게 부쳐
장원례(張元禮)에게 부쳐 드리며
태백산(太白山) 이(李) 산인(山人)에게 부쳐
봄 저녁에 조남(曹南)의 통수(通守) 임중행(任中行) 사승(寺丞)을 생각하며 부쳐
주계명(周啓明) 현량(賢良)이 보내온 시에 화답해
희주(希晝) 스님이 서호에서 봄을 관망한 것에 화답해
괵략(虢略) 수재(秀才)가 칠언(七言) 사운(四韻)의 시를 보냈기에 다행히 본 것이 있어서 바로 화답하며
왕황주(王黃州)의 시집을 읽고
병중에−첫째
조카 유(宥)가 급제한 것에 기뻐하며
권4(卷四)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민(閔) 선생이 천태(天台)에서 돌베개를 보내온 것에 대해
서호(西湖)에서 성(性) 상인(上人)과 이별의 이야기를 나누며
중(中) 선생 초성(草聖)에게 드리며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벽에 쓰다
가을에 호수 안의 정자에서 느낀 것을 적으며
대나무 숲
고산(孤山)에 눈이 내릴 때 멀리 조망하며 쓰고, 경산(景山)의 선위(仙尉)에게 드리며
산중의 한식(寒食)−첫째
가을에 강변에서 보이는 것을 적다
늦봄에 무재(茂才) 풍팽년(馮彭年)에게 부쳐 보여 주며
금릉(金陵) 마(馬) 우승(右丞)에게 부쳐 드리며−첫째
재(才) 상인(上人)이 봄날 내게 보내온 시에 화답해
난계읍(蘭溪邑) 장(長) 사관(史官)에 대한 찬(贊)을 부치며
제고(制誥) 이(李) 사인(舍人)이 소나무 부채 두 개와 시를 남겨 주었기에 역시 시운(詩韻)에 맞춰 시를 짓다
호문(皓文)에게 절구 두 수로 화답하며−첫째
몽(蒙) 위(尉)가 나에게 보내온 시에 화답해
사(謝) 비교(秘校)가 서호(西湖)에서 말 탄 것에 화답해
사(謝) 위(尉)가 관직을 그만두었다는 것에 답해
진일장(陳日章) 수재(秀才)를 보내며
다시 자(慈) 공(公)을 송별하고 호구산(虎丘山)으로 돌아오다
즉석에서 강하(江夏)의 무재(茂才)를 보내며
정(丁) 수재(秀才)가 사명산(四明山)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며
선중(善中) 스님이 사명(四明)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며
대방(大方) 스님이 금릉(金陵)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며
감군(監郡) 오(吳) 전승(殿丞)이 은혜를 베풀었기에 붓과 먹 그리고 건계차(建溪茶)로써 각각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감사하며−붓
감군 오 전승이 은혜를 베풀었기에 붓과 먹 그리고 건계차로써 각각 절구 한 수를 지어 감사하며−먹
감군 오 전승이 은혜를 베풀었기에 붓과 먹 그리고 건계차로써 각각 절구 한 수를 지어 감사하며−차
우는 학
스스로 생전의 무덤을 만들고는 절구 한 수를 써 놓으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해 질 무렵 호수의 누각에서 멀리 바라보며
호수에 하늘의 파란빛 비쳐서,
난간에 기대어 응시하며 한없이 바라보네.
석양 무렵 가을 산은 아직 푸름이 가득하고,
맑은 가을이라 새들이 높이 나네.
큰 뜻은 천 리까지 이르렀지만,
뜬구름 같은 인생은 한 올 털과 마찬가지로 가볍다네.
깊은 숲 속 산사(山寺)를 여러 번 간 것은 아니지만,
아스라한 안개가 고기 잡는 거룻배 저편 산사에서 피어오르네.
·산속 정원의 작은 매화-첫째
많은 꽃들 다 시들었을 때 홀로 예쁘게 피어,
자그마한 정원의 아름다운 정취를 독차지하네.
희미한 그림자는 가로로 맑은 물 얕은 곳에 비껴 있고,
그윽한 향기는 황혼 무렵의 달빛 속에서 풍겨 온다.
흰 새는 내려오려고 먼저 살짝 쳐다보는데,
흰 나비가 안다면 마땅히 애를 끊으리라.
다행히 나지막하게 읊조려 서로 친근해질 수 있으니,
단목 악기나 금 술잔이 모두 필요치 않다네.
·겨울 저녁 산속의 촌락에서
나무 우거진 산기슭에 지은 초옥에도,
봄빛은 이미 어슴푸레하게 다가왔네.
눈 덮인 대나무 아래에는 차가운 푸른빛이 드러나고,
바람 맞은 매화 떨어져 늦은 향기를 풍기네.
나무할 때가 되면 대개는 홀로 나가고,
차밭 가꾸는 일은 늘 바쁜 것도 아니라네.
한 쌍의 백로 시시때때 하늘로 올라,
들판의 연못을 지나 비스듬히 날아가네.
·범중엄(范仲淹) 사승(寺丞)을 보내며
쓸쓸하고 한적한 산속에 있는 나의 오두막집을 두드리는데,
부지런하기가 남아 있는 부스러기까지도 흔쾌히 챙길 정도인 것 같네.
책상을 물리고 맞이하며 강가의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술잔을 멀리하고 잠시 함께 정원의 채소를 따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재주가 많아 늘 부(賦)를 잘 지었고,
매복(梅福)은 관직이 비천했지만 수시로 상서를 올렸네.
황제는 애써 바른 정치를 추구하는데,
어느 때 조서대로 실행되며 공거령(公車令)을 초빙할 수 있을까?